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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nt-magazine.com/ko/interview/swen-vincke-of-baldurs-gat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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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출시된 『Baldur’s Gate III』)
지성과 유머가 겹쳐지는 이야기,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탐험해보고 싶어지는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와 에이전시를 갖춘 의사결정에 기반한 롤플레이.
내가 열중해 왔던 이런 속성을 지닌 RPG가, 2020년대인 지금에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개발사가 딱 한 곳 있다. 그것이 바로 Larian Studios이며, 그 등대지기들을 이끄는 이가 스벤 빙커(Swen Vincke)다.
I.N.T. 편집장으로서, 나는 어떻게든 진정 가치 있는 RPG란 무엇인지, 이 ‘군주’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반년간의 취재 협상을 거쳐, Larian Studios가 자리한 쿠알라룸푸르로 향했고,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벤 빙커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었다.
기획·편집·듣는이/Jini
듣는이/사이토 다이치
글/치바 슈우
사진/이요다 아키히코
번역/아키야마 하야토
인터뷰 일자: 2024년 10월 3일
Jini:
오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게임 크리에이터 중 한 분, 스벤 빙커 님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우선 한 명의 CRPG 팬으로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침체되어 가던 CRPG 문화를, 『Divinity: Original Sin』을 필두로 한 걸작들을 통해 구해내셨죠. 현대에 와서 다시 이런 CRPG를, 그것도 더 훌륭한 형태로 즐길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빙커:
의례적인 인사는 됐습니다.
Jini: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그렇다면, 핵심 질문부터 듣고 싶습니다.
왜, 여러분은 RPG를 만드는 걸까요? 그리고 RPG의 참맛이란 무엇일까요?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처음에는 『The L.E.D. Wars』라는 RTS를 만드셨지만, 사실 원하던 장르는 아니었다고 하셨더군요. 이후로는 줄곧 RPG만 만들어 오셨는데요.
(『Ultima VI: The False Prophet』)
빙커:
RTS도 RPG도 각각의 미(美)가 있지요.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원래 『Dune II: The Building of a Dynasty』 같은 실시간 전략(RTS) 장르를 지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RPG의 길로 들어선 건,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에 가까웠죠.
1996년에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투자자를 구하기 위해 만들 게임을 모색하던 중 『Ultima VI: The False Prophet』1를 접했습니다. 플레이를 통해 완전히 매료된 동시에, 스물 초반이었던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게임이라면 나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
그것이 Larian이 RPG를 만들게 된 원점이었습니다.
Jini:
일반적인 RPG가 아니라, 『Ultima VI』에 감명을 받았다는 말씀이시군요.
빙커:
하지만 90년대 후반, CRPG 시장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투자하려는 기업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RTS를 만든다면 자금을 대겠다”는 퍼블리셔가 나타났죠. 마침 블리자드가 『워크래프트』로 큰 성공을 거두고 빠르게 성장하던 때라, RTS라면 일단 만들기만 하면 잘 팔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벨기에의 신생 개발사였던 우리 같은 팀에게도 진입할 기회가 생겼던 거죠.
그래서 우리도 “RTS를 만들겠다”라는 계약으로 퍼블리셔에게 자금을 조달받았습니다. 낮에는 『The L.E.D. Wars』를 만들고, 밤에는 RPG를 개발하자는 계획이었어요.
저는 그동안 길러온 판타지 소설에 대한 애정과 스토리텔링 능력, 턴제 전략의 전술성 등을 모두 쏟아부어, 『Ultima VI』에 맞먹을 만한 RPG를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젊었기에 가능했던 엄청나게 안일한 생각이었죠. 야심과 전능감에 눈이 가려져,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숲에 발을 들이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RPG의 ‘진수’를 깨닫고 말았습니다.
그 ‘진수’란, 게임 속 모든 캐릭터와 오브젝트, 크리처가 대화, 전투, 상호 접촉 같은 모든 인터랙션을 통해 서로 긴밀히 연결(interconnect)되어 있는 RPG를 의미합니다. 즉, 철저히 시스템 중심적인 RPG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스스로 돌아다니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넣어보자”라고 생각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캐릭터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해집니다. 대화 자체를 위한 시스템은 물론이고, 이동 중 장애물을 피하는 시스템, 적 몬스터와 서로 탐지하게 만드는 시스템도 필수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요소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결국 플레이어는 진정한 자유와 생생한 현실감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Jini:
이는 나중에 ‘Immersive Sim’(이머시브 심)이라 불리는 장르와도 통하는 철학이군요. 20년 가까이 전에 이미 『Divinity: Original Sin』에서 구현될 “진수”를 깨달으셨다는 말씀이네요.
빙커:
맞습니다. 그리고 이 “진수”는 실현이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결국 『The L.E.D. Wars』와 병행 개발하던 RPG—『The Lady, the Mage and the Knight』라는 타이틀이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결심했죠.
“이걸 평생의 일로 삼자. 언젠가 반드시, 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RPG를 만들어야겠다.”
이후 『Divinity』 시리즈가 되는 첫 작품 『Divine Divinity』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진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습니다.
(개발이 중지된 『The Lady, the Mage and the Knight』)
Jini:
그렇군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 매우 핵심적인 답을 들었네요. 하지만 이 답변을 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나누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빙커:
좋습니다.
Jini:
먼저, 빙커 님과 Larian의 과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 제작을 해오셨나요?
빙커:
게임 제작을 시작한 건 제가 12살 때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저는 감염성 단핵구증에 걸려서, 집에서 반년 정도 요양해야 했습니다. 원래는 게임 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이머 키드였는데, 병 때문에 밖에 못 나가게 됐죠. 어린 제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래서 남는 시간을 활용해, 침대에 누운 채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Jini:
빙커 님이 1972년생이니, 84년 무렵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때 어떤 컴퓨터를 사용하셨나요?
빙커:
“신클레어 ZX81”이요. 메모리가 1킬로바이트뿐이었죠.
(신클레어 ZX81. 영국산 호비 컴퓨터 중 하나)
Jini:
이후 겐트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셨지만, 그 이전, 어린 시절의 스벤 소년에게 가장 큰 스승은 누구였을까요?
빙커:
프로그래밍 스승은 노란색 작은 교본이었습니다. ZX81에 딸려 있던 Toni Baker라는 사람이 쓴 『Mastering Machine Code on your ZX81』(네덜란드어판)이었어요. 간단한 게임의 만들기 방법도 실려 있었는데,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그 외에도 『Your Computer』2, 『Computer and Video Games』3 같은 여러 게임 잡지가 있었는데, 이런 잡지들은 게임용 샘플 코드를 게재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열심히 베껴 쓰면서 코딩 기술을 익혔죠.
사이토:
일본으로 치면 『로그인』4 같은 잡지네요. 일본 게임 개발 초창기 크리에이터들도 컴퓨터 잡지나 게임 잡지에 실린 코드를 보면서 학습하거나, 또 자신이 만든 코드를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죠. 제 멘토인 나카무라 코이치5(中村光一) 씨도 바로 그런 경험을 통해 게임 업계에 들어왔어요.
빙커:
저는 잡지 투고가 아니라, 주로 친구들한테 제 게임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 시절, 어떤 전자제품점에 MSX 기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어린이에게는 너무 비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매장의 데모 기기에서 몰래 게임을 코딩해 친구들에게 보여줬어요.
Jini:
무단으로요? 가게 측에서 혼나지 않으셨나요?
빙커:
오히려 좋아했죠. 가게 입장에서도 홍보가 됐으니까요. 다른 손님들이 “이게 뭐지?” 하고 물어보면, 제가 적극적으로 설명했거든요. 그러자 점점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저는 말하자면 그 전자제품점이나 PC 업체의 비밀 홍보팀 같은 존재였던 셈이죠.
Jini:
옛 닌텐도 사장이었던 이와타 사토루도 같은 에피소드를 회고했던 게 떠오르네요. 그도 일본의 백화점에 있는 컴퓨터 코너에서 게임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즐기게 했다고요. 그게 그의 게임 제작 원점이었다고.
빙커:
다른 사람이 내 창작물을 직접 만져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야말로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와타 씨 역시 그것을 아는 분이었겠죠.
Jini:
처음으로 당신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은 누군가요?
빙커:
제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사냥꾼이기도 했는데, 아버지를 위해 사냥을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사냥총의 조준을 나타내는 작은 사각형 블록을 상하좌우로 움직여, 화면 곳곳을 도망치는 다른 사각형 블록(사슴을 표현한 것이죠)과 부딪치게 만드는 아주 간단하고 귀여운 프로그램이었어요. 아버지는 무척 기뻐해 주셨습니다. 정말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죠.
그 후로는 친구들과의 중요한 놀이 도구가 됐습니다. 저는 특히 전략 게임, 그중에서도 턴제 전략을 자주 만들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Conqueror』라는 타이틀의 게임이었습니다. 화면 분할 방식의 판타지 전략 게임이었는데, 우리끼리 자주 했죠. 또 하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일 높았던 건 아마 『War』라는 이름의 게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올드스쿨한 턴제 전략이었어요.
Jini:
턴제 전략 게임을 만들 때, 참고했던 작품이 있나요?
빙커:
제가 턴제 전략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된 계기는 『Empire』6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원래는 보드게임에서 발전한 워게임인데요.
또 하나는 아미가(Amiga)에서 나온 Ubisoft의 초기작 『Celtic Legends』7. 지금은 잊힌 작품이겠지만, 당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후에 RTS 붐으로 이어지는 어떤 세련미를 미리 보여준 게임이었달까요.
(『Celtic Legends』)
Jini:
그렇군요. RPG뿐 아니라 RTS, 그리고 그 근원인 워게임의 영향도 받으신 것 같네요. 『Celtic Legends』도 판타지 전략 게임인데, 그 시절부터 판타지에 끌리셨나요?
빙커:
네, 그렇습니다. 다만 그 시절 판타지의 본고장은 소설이었죠.
제가 판타지 장르에 빠져든 계기는 친구가 빌려준 『드래곤랜스』8 시리즈였습니다. 『던전 앤 드래곤(D&D)』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죠. 그 뒤로 판타지의 원조인 『반지의 제왕』 전권을 쭉 읽었는데, 어떤 작품이든 너무 재밌어서 밤새 읽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판타지 때문에 밤을 새우게 된다는 점은, 지금 제 생활과도 별반 다르지 않네요(웃음).
Jini:
대학 졸업 후, 1996년에 Larian을 설립하셨습니다. 벨기에처럼 게임이 주류 산업이 아닌 국가에서 게임사를 창업하는 일은 엄청난 고생이 따랐을 텐데요.
빙커:
네. 90년대 당시 벨기에는 “게임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발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Outcast』9를 만든 어필(Appeal)사 같은 곳이 있었을 뿐, 업계 전체의 규모는 매우 작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제 입장에서 “게임 회사에 취직한다”는 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회사를 차린 거죠.
(어필(Appeal)사의 『Outcast』. 당시 드물었던 벨기에산 게임)
Jini:
하지만 창업을 하려 해도 인력이나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숙제였을 텐데요.。
빙커:
바로 그렇습니다. “산업이 없다”는 건 그 분야에 돈도 사람도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현지에서의 투자나 인재 확보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추진하려면 인력을 처음부터 교육해야 하고, 모든 과정에서 일일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비용이 늘어나게 됩니다. 즉, 해당 산업이 이미 자리 잡은 나라보다 추가적인 비용이 더 드는 것이죠.
게다가 해외에서조차 “저 나라는 게임 산업이 없어”라고 인식되는 현실도 발목을 잡았습니다.
해외 게임쇼에서 퍼블리셔에게 게임을 홍보할 때마다 저는 항상 핸디캡 같은 걸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 벨기에에서 왔습니다만…”
“아… 그래요? 벨기에구나⋯⋯ 음⋯⋯.”
이런 식으로 왠지 모를 의심과 미묘한 거리감을 담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발짝 물러나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제대로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거죠.
반면, 현지 개발자들은 같은 조건에서도 손쉽게 계약을 성사시키고, 퍼블리셔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질투심에 속이 타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설령 다른 나라의 퍼블리셔와 계약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다이얼업 접속이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연락에도 서로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처럼 멀리 떨어진 사람과 쉽게 대화하는 건 불가능했던 거죠.
Jini:
당시라면 미국 등 시장이 큰 해외로 직접 넘어가 개발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벨기에에 남으셨나요? 또, 그곳에 남았기에 얻은 경험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빙커: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제가 벨기에에 남은 건 전적으로 가족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 아내 때문이고, 제 친구들도 있지요. 지금도 1년 중 절반은 Larian의 여러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느라 해외에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벨기에에 머물려 합니다.
또, 벨기에에서 얻은 통찰이라고 한다면, 저는 벨기에에서도 드 판네(De Panne)라는 해안 도시에서 자랐는데, 여기마저 프랑스 국경과 가까워서 전 세계 관광객이 몰려오는 곳이었어요. 부모님은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는데, 거기에 오는 관광객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문화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벨기에는 중세풍 건축물도 좋은게 많이 있어서, 중세 판타지를 만들 때 정말 유용했어요.
(프랑스-벨기에 국경 근처 해변 도시 드 판네 [사진: Szilas])
Jini: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Larian은 전 세계에 7개 지사를 둔 게임 스튜디오로 성장했고, 빙커 님 본인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크리에이터가 되셨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빙커:
아뇨, 회사를 세우기 전부터 제가 만든 것을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저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 사냥 게임을 즐기게 해드리거나, 친구들에게 전략 게임을 플레이하게 했던 그 시절부터, 그것은 언제나 제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제 작품 팬들로부터 그들의 게임 체험담을 듣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게임쇼에 가서 관람객들이 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직접 그들의 감상을 듣는 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바로 이 마음이 줄곧 제 창작 활동의 핵심이었으며, Larian을 특별한 회사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돈은 물 쓰듯이 빠져나갑니다. 비용을 전혀 따지지 않는다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많았습니다. 사실, 적당히 타협한 수준의 게임을 빠르게 만들어 내는 전략보다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강점을 철저히 파고드는 쪽이 결과적으로 살아남는 길이라는 판단이었죠. 오늘날까지 이렇게 이어져 온 건 분명 운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무모한 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어쩌면 『The L.E.D. Wars』 이후로도 계속 RTS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죠.
RPG를 계속 만든다는 건 젊었던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웠고, 인력과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Baldur’s Gate 3』나 『Divinity: Original Sin』이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어려운 길이었기에, 그 선택에 더 큰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들판으로 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Jini:
게임 제작의 핵심적인 부분에 관해 여쭙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Larian의 RPG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턴 기반 전투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사실 90년대 고전 CRPG의 전투는 솔직히 지루한 편이었는데,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죠.
그래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스템 중심의 RPG 중에서도 특히 턴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리얼타임 방식 게임에는 어떤 불만을 느끼셨던 걸까요?
빙커:
좋은 지적입니다. 전투는 우리도 오랫동안 깊이 파고든 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먼저 밝혀두자면, 저는 리얼타임 기반의 게임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저 자신도 리얼타임 게임을 종종 즐깁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직접 게임을 만든다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의사결정에서 오는 ‘수를 읽는 재미’”라는 점이죠.
특히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보다 깊이 있는 전략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체스 플레이어이기도 한데, 체스는 한 수 한 수를 결정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쓰잖아요? 하지만 리얼타임 게임에서는 심사숙고할 여유를 얻기 어렵습니다. 물론 일시정지 기능이 있는 리얼타임 게임도 있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턴제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병력을 사단 단위로 크게 움직이는 RTS라면 모를까, 소수의 유닛만을 조작하는 RPG에서는 턴제 방식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Jini:
그런데 초기작 『Divine Divinity』는 리얼타임 기반이었습니다. 2014년 『Divinity: Original Sin』부터 턴제로 전환했는데, 그 사이에는 어떤 인식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빙커:
사실 우리 첫 번째 RPG인 『Divine Divinity』는 핵앤슬래시 장르였습니다. 『Diablo』가 정립한 스타일이죠. 전투는 물론 리얼타임이었고, 게임 자체는 나름대로 잘 팔렸으며 평가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선택이나 전술적 결정에 있어서 더 깊이 있는 재미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후속작부터는 턴제 전투로 바꾸려 했고, 실제로 후속작의 개발 초기는 턴제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에이전트와 퍼블리셔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E3에서 기획안을 발표했을 때 “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 리얼타임이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는 퍼블리셔 측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결국 리얼타임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시리즈 2편 『Beyond Divinity』와 3편 『Divinity II: Ego Draconis』까지 리얼타임 방식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Divine Divinity』. 시리즈 첫 작품으로, 당시엔 턴제가 아니라 리얼타임 전투였다)
Jini:
하지만 결과적으로도 그 전투 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네요.
빙커:
우리 작품에서 전투 파트는 언제나 최대 약점이었습니다. 그래도 상업적 이유로 리얼타임 전투를 계속 채택해야만 했죠.
결국 『Divinity II』는 제 기준에서 실패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실패 원인을 끊임없이 되짚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어요.
“게임은 모든 부분, 어떤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재밌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한두 부분이 “제법 재밌다”고 해서 플레이어가 수십 시간이나 계속 즐겨 줄 리 없습니다. 게임 속의 모든 요소가 전부 다 재미있어야 비로소 플레이할 가치가 생기죠.
우리가 만든 게임의 가장 큰 약점이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전투부터 최우선으로 뜯어고쳐야 했던 겁니다.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Divinity: Original Sin』의 제작이 진행 중이었는데, 당시 전투 시스템은 이전 세 작품과 마찬가지로 리얼타임 방식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사무실에 있던 개발자를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소집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전부 다 바꿉시다. 전투를 턴제로 가요. 이게 우리 개성의 핵심이 될 겁니다.”
퀄리티 높은 턴제 전투가 들어간 RPG——그것이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요.
이 결정은 Larian이라는 회사의 전반기 최대 분기점이었고,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일 수 있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과거 실패를 거울삼아 교정 포인트를 찾고, 거기에 집중한 끝에 『Original Sin』에 다다를 수 있었죠.
(턴제로 전환된 『Divinity: Original Sin』)
Jini:
그 결과, 『Divinity』 시리즈는 『Original Sin』을 계기로 크게 흥행했고, 최신작 『Baldur’s Gate 3』는 단독으로도 2천만개 이상 판매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으로 거점을 확장해, 더욱 대규모 게임을 만들고 계시죠. 『D:OS2』 당시에는 직원이 200명이었다는데, 지금은 500명에 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개발 환경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 텐데, 빙커 님의 게임 제작 스타일은 무엇이 바뀌고, 또 무엇이 그대로인가요?
빙커:
음, 많은 게 달라졌지만, 또 한편으론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죠.
Jini:
그건 어떤 뜻인가요?
빙커:
「플레이어의 선택이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게임을 만든다」저는 이 목표를 언제나 변함없이 추구해왔습니다.
Jini:
플레이어를 위한 이야기라는 말씀이군요.
빙커:
RPG에서 이야기란 주어지는 동시에 플레이어가 직접 써 내려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게임을 지속할 동기를 제공하는 동시에,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인터뷰 초반에 말씀드렸던 “RPG의 진수”, 즉 게임 내의 모든 요소가 모든 인터랙션을 통해 서로 연결된 상태를 추구할 때 우리가 중시해야 할 가치를 저는 ‘FUME의 원칙’이라는 형태로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해왔습니다.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F──자유(Freedom)
U──그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세계(Universe)
M──그 세계를 탐험할 동기(Motivation)
E──그 탐험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흥미로운 적(Enemy)
이 원칙은 완성하지 못했던 『The Lady, the Mage and the Knight』 때부터 제가 계속 붙들고 있던 것이고, 지금도 게임을 점검할 때 항상 이걸 염두에 둡니다.
이 4가지 요소가 고루 갖춰지지 않으면, 적어도 RPG로서는 뭔가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죠.
저희는 FUME의 원칙을 꾸준히 지키려 노력하면서, 자체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세계 구성과 스토리 구성, 게임 메커닉과 시스템, 시뮬레이션, 비주얼에 모두 숙달되었고, 테크놀로지 측면도 발전시켰어요. 하지만 목표는 여전히 같습니다.
Jini:
제가 게임 프로듀서로 일해본 경험을 떠올리면, 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제작 현장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쉬운데, Larian은 빙커 님이 현장을 치밀하게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비결이 뭘까요?
빙커:
모두에게 ‘에이전시(Agency, 행위 주체성)’가 깃들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개발 과정에서 어느 순간, 팀원들이 “게임의 핵심”을 깨닫는 단계가 옵니다. 일단 그 핵심을 이해하고 나면, 제가 대략적인 방향만 제시해도 게임 전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 시작하죠.
물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팀원들에게 자유를 주면서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세세한 지시를 통해 대략적인 길을 잡아줘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팀원들이 모든 걸 터득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들만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었던 결과물이 탄생하게 되죠. 개발자로서 진정한 성취감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제가 상상조차 못했던 충격과 감동이 찾아오니까요.
Jini: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빙커 님 자신의 의도를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이해시키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기획서나 미팅 같은 수단을 떠올리는데, 그것만으론 에이전시를 심기 어렵잖아요.
빙커:
네, 그래서 저는 주기적으로 사내 게임 방송(스트리밍)을 진행합니다.
개발 중인 게임을 제가 직접 플레이하면서 마이크로 주요 포인트를 설명하고, 느낀 점, 보이는 문제점, 변경했으면 하는 점 등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죠.
이 ‘스벤의 플레이’ 리뷰 영상을 사내에 공개해서 모든 직원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제가 “첫 번째 플레이어”로서 직접 피드백을 주는 셈이죠.
모든 직원이 방송 화면을 보면서 준비된 슬랙(Slack) 채널에 의견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제가 튜토리얼 장면을 플레이하다가 “여기가 마음에 걸리니 바꿔주세요”라고 이야기하면, 그런 과정을 충분히 반복하는 동안 팀원들이 자연스레 제 요구사항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더 이상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개발자 스스로 “아, 이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네”라고 알아차리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일종의 집단지성이 형성되면서 게임은 극적으로 개선됩니다.
어떤 걸작이든 처음 만들어지는 프로토타입은 대개 엉망이죠. 그것을 반복적인 피드백 과정을 통해 철저히 갈고닦는 겁니다.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보다 게임 방송(스트리밍)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문서는 어디까지나 처리해야 할 업무를 정리해두는 용도로만 남겨둡니다. 평소에는 주로 스크린샷과 눈에 띈 체크 포인트 정도만 메모하는 방식이에요.
『BG3』 슬랙 채널에 들어가면 ‘스벤 리뷰(Swen Review)’라고 불리는 개선점들을 나열한 긴 리스트가 있습니다. 여기에 제가 앞서 말한 리뷰 영상도 함께 첨부되어 있어서, 요구사항의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죠.
재미있는 건, 제 리뷰가 있기 전부터 이미 개발팀 내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서로 리뷰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게임의 퀄리티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고, 그 자체로도 자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겠죠.
Jini:
방송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때, 특히 어디를 중점적으로 보시나요?
빙커:
전부 다.
제가 확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특정 요소가 아니라, “전체가 믿을 만한가?” 하는 점, 즉 ‘신빙성(Believability)’입니다. 게임 전체, 거기에 구현된 세계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미묘한 차이들은 게임 플레이 경험 곳곳에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했을 때, 이야기 전개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충분히 지적이고 흥미롭게 구성되었는지? 플레이어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지? 세계와 연결된 느낌을 받고 있는지?
흐름(Flow), 타이밍, 페이스 배분(리듬)은 신빙성에 무척 중요합니다. 이 요소들이 어긋나면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네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바로 ‘기시감’입니다. 이전에 봤던 장면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늘 새로움과 놀라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이토: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그래서인지, Larian의 RPG는 단순히 방대(Massive)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세부 요소에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지 궁금했는데, 에이전시를 갖춘 일기당천의 개발자들과 ‘스벤 리뷰’를 통해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그 질과 양 모두 흠잡을 데 없는 걸작이 탄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빙커:
그리고 저희는 개발자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에이전시 또한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가 재미있는 방식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흥미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만약 이런 요소가 없다면, 단순히 책이나 영화처럼 ‘남이 겪는 일을 구경만 하는 매체’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세계나 사건에 주체적으로 개입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투에도 구조가 있고,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리듬이 존재합니다. “이 전투에서 흥미로운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 “이런 전투를 이미 이전에 본 적은 없는가?” “전투가 이야기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 도전에 걸맞은 보상은 주어지는가?”⋯ 결국은 ‘이 전투가 이 시점, 이 장소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메커니즘을 활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Jini:
하지만 플레이어가 에이전시를 갖고 게임에 임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피곤하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플레이어를 위해 어떤 장치를 두고 계신가요?
빙커:
플레이어가 행동하거나 사고할 힌트를 주기 위해, 온갖 장치를 배치합니다. 그중 하나는 적 AI가 특정 행동을 일부러 보여줘서, “아, 나도 저런 걸 할 수 있구나”라고 플레이어가 깨닫게 하는 방식이에요.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플레이어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솟으면서 게임에 매료됩니다. 그러고는 더 많은 쾌감을 찾아 여러 가지 행동을 시도해보죠.
우리는 플레이어의 에이전시를 최대한 자극하고, 거기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Jini:
『BG3』에서 초기 설정인 ‘모험가’ 난이도로 해도, 적들이 창의적 방법으로 플레이어를 전멸시킬 때가 많습니다. 저것도 단지 어렵게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에이전시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군요.
빙커:
전투가 너무 쉽다면, 플레이어가 자극을 받을 여지가 줄어듭니다. 어렵기 때문에 도전심이 샘솟고, 다양한 전술을 시도해보고 싶어지는 거죠. 그래서 높은 난이도도 우리 게임의 트레이드마크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의가 넘치는 적 AI)
Jini:
일본에는 “쇼켄고로시(初見殺し/초견살)”라는 표현이 있는데, 초면에 만나는 적의 공략 방법을 몰라서 바로 즉사당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빙커:
오, 저는 개인적으로 “HP를 1만 남겨두는” 방식이 더 좋네요. 한 번 죽으면 몰입감이 깨져버릴 수도 있으니,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이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하고 몰리는 상황이 더 재미있다고 봅니다. 그러다 겨우 헤쳐나올 때의 쾌감, 그걸 게임플레이로 제공하고 싶거든요.
Jini:
일본에선 그걸 마조히즘이라 부릅니다.
빙커:
벨기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Jini:
이야기와 체험에 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느끼는 점은, Larian의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적이든 아군이든—이 매우 인간적이라는 거예요. 선악 이분법으로 구분하기 어렵고, 누구나 선과 악, 강함과 약함을 함께 지니고 있죠. 이것은 정말 높은 수준의 표현인데요. 특히 주인공 일행이나, 플레이어 자신이 될 수 있는 오리진 캐릭터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의도하신 일관된 방향성일까요?
빙커:
네, 우리는 ‘인간적인 약점’을 캐릭터 아크를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두려움이라든지, 잃어버린 것들, 배신당한 경험, 마음의 상처⋯ 이런 어둡고 내밀한 부분에서 캐릭터의 개성과 윤곽을 잡아줄 단서를 찾는 거죠.
또 캐릭터가 자신의 부정적인 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중요한 묘사가 됩니다. 타인에게 숨기려 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솔직하게 털어놓는지 같은 부분이요.
물론 이런 개별적인 반응 하나하나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처럼, 캐릭터가 보여주는 이런 작은 반응들이 쌓여가면서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 내면의 변화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BG3』의 인기 캐릭터 중 한 명, 아스타리온)
Jini:
근대문학 기법이네요. 에밀 졸라가 말한 자연주의 문학처럼.
빙커:
하지만 영화나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Larian의 RPG에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캐릭터 아크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Baldur’s Gate 3』는 동료, 즉 오리진 캐릭터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결정해야 합니다. 파티 내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과 관계는 그 캐릭터 자신의 인격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수정과 다듬기를 거듭하며 캐릭터의 개성을 탐색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이 캐릭터는 이 방향으로 가자” 하고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처음 구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도 있고, 때론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을 때도 있죠.
캐릭터에 대한 첫 느낌은 우선 개발팀 내부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이미 팀원들이 그 캐릭터를 플레이하거나 움직이는 것을 흥미로워한다면, 플레이어에게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가능성이 높죠. 반대로 현장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경우에는 그 시점에서 캐릭터를 폐기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시간이 많이 걸리는 프로세스임은 분명합니다.
Jini:
플레이어의 선택에 이야기를 맡기는 것이 Larian의 철학이라고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Larian 게임에는 대화나 행동 모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택지가 준비되어 있죠.
그런데 다른 게임들과 비교해도 콘텐츠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양의 콘텐츠를 제작할 시간과 자원을 대체 어떻게 마련하시는 건가요?
빙커:
플레이어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플레이어가 실제로 고른 하나의 선택이 더욱 특별하게 부각되니까요. 물론 이를 위해서는 “모든 선택지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단 1%의 플레이어만 발견하는 이벤트라 하더라도, 99%의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이벤트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만듭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이 모험하고 있는 세계를 진짜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플레이어는 선택을 거듭하는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결정이 의미 있었음을 깨닫고, 그 플레이가 오직 자신만의 것이며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다른 모든 가능성도 전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적극적인 욕구가 생기게 되죠. 바로 이렇게 플레이어의 에이전시가 촉발되는 것입니다.
(선택이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들어나간다)
사이토:
그건… 네, 이해는 갑니다만… 게임 개발자로서는 터무니없는 작업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빙커:
맞아요. 터무니없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말도 안 되는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 그게 Larian이니까요.
Jini:
또 『BG3』의 로맨스 요소는 인간관계를 아주 성숙하게 풀어내면서, 여러 형태의 성을 재현하고 있잖아요.
빙커:
사랑과 로맨스는 인간의 본질이자 인간관계의 한 축입니다. 다른 사람과 깊이 있게 교류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죠.
성숙한 내러티브로서 인간의 본질과 인간관계의 본질을 제대로 그려내고자 한다면, 로맨스를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배제하면 세계를 재현하는 이야기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가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선 안 됩니다.
Jini:
“1%의 선택지도 전력을 다해 만든다”고 하셨지만, 플레이어 캐릭터로 쓸 수 있는 오리진 캐릭터 전부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아닐까요? 이는 곧 캐릭터마다 각기 다른 고유 시나리오를 전부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라,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 텐데요.
에이전시를 추구하는 RPG라는 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커스텀 캐릭터”로 플레이할 텐데, 실제로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시점에서 93%가 커스텀 주인공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겨우 7%를 위해 그 정도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일반적인 경영진이라면 “굳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빙커:
“플레이어가 자신을 연기하지 않는 선택지” 역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리진 캐릭터로 플레이하면, 커스텀 주인공일 때는 동료로 등장할 캐릭터를 시점 주인공으로서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쪽 사정도 있습니다.라이팅 팀이 그 캐릭터의 시점에서 고민하도록 유도하고 싶었거든요. “이 캐릭터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걸, 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서) 전면에 세운 상태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오리진 캐릭터의 인물상을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탄탄히 만들어 두면, 동료로 등장할 때의 표현도 더욱 깊이 있어집니다. 스토리적으로는, 말 그대로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또는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환되는 셈이죠.
그 세계에 몸을 담고, 캐릭터의 시점에 몰입하며, 그들과의 여정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 같은 경험. 저희가 스토리를 만들 때의 목표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각도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수많은 선택지를 준비하죠.
물론, 현재 시점에서도 우리는 “정말 게임에 충분한 선택지를 넣고 있는가?” 하고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엔 한계가 있고, 현실을 온전히 담아낼 정신적 대역폭 또한 좁습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비로소 모든 가능성에 열린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Jini:
크레이지(Crazy).
(스튜디오 내의 책장. TRPG 룰북이 줄지어 있다)
Jini:
마지막 질문입니다. 빙커 님은 『Baldur’s Gate 3』의 DLC를 만들 계획도, 후속작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신작에 대해 공개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 신작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기고 싶은 점이 있다면 가르쳐주세요.
빙커:
네, 지금으로선 어떤 신작이 될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변함없습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이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였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선택을 거듭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쌓아가게 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플레이어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나쁘게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즉, 플레이어의 에이전시에 보답하는 게임. 그건 변치 않을 거예요.
마치 주문을 읊조리듯, 그는 줄줄이 우리에게 ‘마법’을 걸어가는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전략 게임을 만들어왔다는 이야기, <FUME>의 원칙, 게임 방송을 통한 디렉팅… 놀라움이 끊이지 않는다.
거의 우연처럼 찾아온 RPG와의 만남이, 한 젊은 개발자에게 신념을 심어주어, 게임 불모지 벨기에에 역대급 RPG 스튜디오—이른바 ‘왕국’을 세우게 했다.
자유와 선택을 표방하는 RPG는 많다. 서양 게임은 물론이고, 흔히 “일직선 진행”이라 불리는 일본의 메이저 RPG조차도, 그들 나름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선택을 추구해 왔던 것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마 우리 플레이어들이 RPG 안에서 자유와 선택을 원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가능성을 찾고, 인생을 느끼고, 또 다른 세계를 그곳에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자유와 선택이 가능해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싶다.
자유롭다는 것,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대화에서 여섯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어느 것도 정답도 오답도 아니며, 게다가 한 번 고르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이게 자유라는 것이다. 너무 무섭고,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Larian의 게임은 대화에서도 전투에서도 그 무서움을 늘 내보인다. 선택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세공된 이유는, 실제로 엄청난 공을 들여 갈고닦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개발자들이 철저히 다듬고 단련한 ‘선택’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개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에이전시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Larian은 스벤 빙커 한 사람이 홀로 다스리는 왕국이 아니다. 오히려 “Larian”이라는 왕국의 영혼이 스벤 빙커라는 개인의 몸 안에 깃들어, 그 의지를 모든 직원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것이⋯⋯다른 스튜디오에도 가능할까?
에어컨이 켜진 스튜디오를 나오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덥다. 거센 비가 거리를 쉴 새 없이 내리친다.
우기에 접어든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스콜이 끊임없이 퍼붓는다. 스모그 같은 안개비가 고층 빌딩과 KL 타워를 뒤덮고, 그것이 천둥소리에 기묘하고도 몽환적으로 번쩍인다.
피부에 달라붙는 물방울이 스콜의 빗방울인지 내 땀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일본도 점차 아열대 기후가 되어 간다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일본과도 닮았다. 어쩔 수 없이, 여기는 아시아였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머물던 빌딩을 돌아보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공간은 정말로 존재했던 걸까?
셀 수 없이 많은 트로피가 늘어선 입구, 『Baldur’s Gate 3』와 『Divinity』 시리즈의 디자인으로 가득한 복도, 서양풍 대검과 칼이 놓인 모션캡처실, 용맹스러운 표정의 직원들, 은은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 그리고 위엄 있는 “왕”.
우리는 취재 전에 만났던 어떤 Larian 개발자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세계도, 그가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일지 모르죠.”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번 인터뷰 세션은 다른 의미에서도 ‘세션’이었던 셈이다. 그가 게임마스터(GM)가 되고, 우리가 플레이어가 되는 TRPG의 세션. 그리고 이 글은 그 ‘리플레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자, 선택하라. 주사위를 굴려보자. 모험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니까.